웬만한 보석에 준하는 고가·희소가치로 평가…
‘아날로그 감성 필기구’넘어 명품 액세서리로
통독·EU통합 등 역사적 서명엔 꼭 등장…
세계서 가장 비싼 제품은 1250만원대 몽블랑 솔리테어 로열라인


편리함과 실용성을 제1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필기구의 중심이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옮겨간 지는 꽤 오래됐다. 그러나 ‘아날로그의 대명사’인 만년필(萬年筆)은 그 이름처럼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면서 디지털 시대의 첨단을 달릴수록 더욱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경제적인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대량생산 제품보다 소량생산 수제품에 대한 로열티가 높아지자, 만년필은 필기구를 넘어서 명품 액세서리로 다시 포지셔닝됐다.


은근하게 품격을 드러내는 방법

VIP 스타일의 절정을 장식하는 것은 옷도 가방도 신발도 아닌 필기구다. 비즈니스 미팅 시 말끔한 슈트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고급스러운 만년필은 사용하는 이의 품격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 그 만년필을 사용하는 순간까지도 특별하고 가치롭게 만들어준다. 그 때문에 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시점과 장소에는 항상 그에 걸맞은 만년필이 함께 자리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1990년,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디메제이로 동독 총리가 ‘통일조약서’에 서명하는 순간을 함께한 것은 몽블랑 마이스터스틱 149였다. 그라폰 파버카스텔 기로쉐는 유럽연합(EU)의 정치통합 비준안에 서명할 때, 오로라 탈렌튬은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개최 확정서에 서명할 때 사용됐다. 그런가 하면 작가 코난 도일은 파커 만년필로 ‘셜록 홈즈’를 집필했으며, 작곡가 푸치니 역시 파커 만년필로 오페라 ‘라 보엠’을 작곡했다.

자신에 어울리는 만년필을 사용하면서 해당 브랜드나 제품에 얽힌 스토리까지 꿰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비즈니스 미팅에서 좋은 화젯거리가 되기도 한다.

현재 국내에는 몽블랑, 콘웨이 스튜어트, 파커, 워터맨, 크로스, 오로라, 펠리칸, 그라폰 파버카스텔 등 10여종의 명품 만년필이 판매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무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것은 브랜드별 클래식 모델이다.

고급 만년필의 대명사인 몽블랑의 ‘마이스터스틱’ 라인은 독일어로 ‘걸작(傑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1924년 출시 이후 86년간 단 한 번도 형태가 바뀐 적이 없다. 그러나 특유의 고급스러움과 은근한 세련미로 현재까지도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이 제품은 독일 함부르크 공장에서만 생산되며 절대 하청 생산을 하지 않는데, 금 펜촉에 백금으로 새긴 상감무늬는 보석 세공이 준하는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펜 전문 오프라인 매장 ‘펜카페’의 박근일 대표는 “만년필의 품질이나 가치가 반드시 가격에 비례하지는 않으며 금촉을 사용한 펜의 필기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며 “실용성을 따진다면 필기감이 좋고 가격대가 자신에 걸맞은 제품을, 선물용으로는 스테디셀러인 클래식 라인 제품을, 소장용이라면 희소가치가 높은 한정생산 제품을 골라야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희소성의 미학…리미티드 컬렉션

고급 만년필 한 필은 웬만한 보석에 준하는 높은 가격과 희소가치를 자랑한다. 몽블랑은 1987년 노버트 플라트 사장이 취임한 이후 고가 차별화 정책을 추구하며 20달러 이하의 저가 제품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그리고 1992년부터 매년 문화와 예술 발전에 위대한 공헌을 한 역사적인 인물을 한 명씩 선정해 그의 이름을 딴 한정판 제품을 디자인해 몽블랑의 고도 4810m를 상징하는 의미로 4810개만 한정 생산하고 있다. 제품의 희소성을 높이자 몽블랑의 시장점유율은 10%나 증가했다. 현재 기네스협회에 등록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만년필은 몽블랑의 ‘솔리테어 로열’ 라인이며 가격은 11만유로(한화 약 1250만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249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펜 브랜드 ‘그라폰 파버카스텔’도 리미티트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매년 한정 수량으로 ‘올해의 펜(Pen Of The Year)’ 컬렉션을 제작하고 있는데, 독일 현지의 장인이 독특하고 진귀한 재료를 사용해 수공예로 제작하기 때문에 매해 빠짐없이 이 컬렉션을 수집하는 마니아가 적지 않다. 이 컬렉션은 펜 하나하나에 시리얼 넘버가 매겨져 있고, 케이스 안에 한정판임을 증명하는 보증서가 동봉돼 있다. 한 번 소진되고 나면 결코 추가 생산되지 않으므로 오래 소장할수록 가치가 상승한다.

2010년 ‘올해의 펜’은 19세기 사냥용 라이플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전적으로 디자인된 제품으로 1500개 한정 생산됐으며 35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 코카시안 호두나무로 만든 몸체와 24K 금을 음각으로 파서 상감 장식한 펜촉이 고풍스럽고 자연스러운 멋을 풍긴다.


<나에게 맞는 만년필은?>

입문자엔 라미 사파리 시리즈

CEO는 몽블랑 마이스터 스틱

▶만년필 입문자=처음 만년필을 사용하거나 대학생 이하의 젊은층이라면 미니멀한 디자인과 컬러, 실용성을 강조한 4만~5만원대의 라미(Lamy) 사파리 시리즈로 입문해볼 만하다. 저렴한 가격대에 비해 필기감이 좋다는 평을 받고 있다. 펜촉 굵기를 4가지 중 선택할 수 있어 가는 촉을 골라 필기용으로 사용해도 좋다.

▶사회초년생=만년필은 대학 졸업 혹은 취업 선물로도 인기가 높다.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이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적당한 품위를 갖춘 10만~20만원대의 워터맨(Waterman) 엑스퍼트나 헤미스피어 시리즈, 파카(Parker) 뉴소네트 시리즈가 알맞다. 선물용일 경우 받는 이의 이름이나 이니셜을 각인하면 특별한 느낌이 더해진다. 각인 서비스는 일정액 이상 구매 시 대부분의 매장에서 무료로 해준다.

▶40ㆍ50대 기업 간부ㆍ중견 사업가=사업상 만남이 잦은 중년층 비즈니스맨에게는 50만~60만원대의 좀더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추천한다. 동급 만년필 중에서는 검은 바탕에 14K와 플래티늄 투 톤으로 된 수공 펜촉, 뚜껑에 고유의 화이트스타 로고가 새겨진 몽블랑(Mont Blanc) 마이스터스틱 플래티늄 145가 가장 인기 있다. 그라폰 파버 카스텔(Graf von Faber-Castell)의 기로쉐 라인과 천연 나무 재질로 된 클래식 라인도 호응이 높다.

▶CEO 또는 VIP=이들에게 있어 만년필은 수억원에서 수천억원에 이르는 큰 계약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도구다. 필기용보다는 계약서 사인용, 조인식용인 경우가 많아 고급스러운 외형과 품격이 강조된다. 뚜껑이나 몸체에 금장식 또는 사파이어 등 유색 보석이 박혀 있는 화려한 제품도 많다. 80만~90만원대부터 1000만원이 넘는 제품까지 가격대의 폭이 넓으며, 100만~200만원대 제품으로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틱 솔리테어 라인, 워터맨 세레니테 마키에와 에드슨 다이아몬드 블랙 라인이 대표적이다. 국내에 수입된 만년필 중 가장 비싼 것은 4개의 펜을 한 세트로 구성한 워터맨 제품으로 5000만원에 판매 중이다.

헤럴드경제2010-07-05 09:37 김소민 기자/som@heraldm.com